나는 아버지에게서 많은 것을 받았는데, 나는 내 아들에게 준 것이 없다. 그런데도 기대 이상으로 커 준 아들이기에 자랑스럽다.
아버지에게서 받은 게 무언가? 아버지는 나에게 무엇을 주었는가? 어느 술자리에서 친구가 너의 아버지는 어떠한 분이었나? 라고 물은 적이 있다. 그때 막연하게 내가 제일 존경하는 분이며, 나에게만은 대단한 분이었고, 자랑스러운 분이었다고만 답하고 다음에 이런 기회가 있으면 다음과 같은 분이었다고 가물거려지는 기억을 더듬으며 두서없이 기술해 본다. 아버지는 재주가 많으셨던 분이다, 손재주가 많으시던 분으로 걷는 것 외는 교통수단이 없을 때, 대다수 동내분이 죽을 때까지 병원 약국을 모르고 사시던 때, 동내에서 무면허 의료행위를 하였고, 군 소재지 내 가축이 아플 때 침으로 다루시던 분이었고, 동내 분들께 도장을 파주시고, 동내 분들께 한글을 가르쳤던 분이었고, 그 시절 손수 이룬 논밭 데기도 자식 명의로 샀고, “국민학교만 나왔으면 높은 사람이 되었을 거라” 술만 잡수시면 하시던 분이였고, 딸자식은 초등학교밖에 시키시지 않으셨으나 장남이 잘되어야 집안이 썬다고 하시며 밥을 굶으면서까지 마을이 생기고 처음으로 나를 대학 공부시키신 분이었기에 내가 존경하지 않을 수 없는 분, 나의 아버지였다.
중학교 2학년 때 나의 꿈은 이발소에 가 한번 머리를 깎아 보는 것이었다.
다른 애들은 보리 추수, 벼 추수 때 이삭을 주워 이발소에 갖다 주고 일 년 내내 머리를 깎았으나, 나도 이삭을 주었으나 살림에 보태고 한 번도 이발소에는 가보지 못했다.
이른 새벽에 일어난 나는 눈곱을 때며 윗마을 큰집에 바리캉을 빌리려 간다. 바리캉은 아버지 형제 다섯 분 중 대구에 사시는 삼촌 외 큰집과 삼촌 두 분의 작은집 공용으로 사용하는 두 손으로 사용하는 이발 기구다. 자주 사용하지 않아 머리카락이 씹히면 탈곡기에 사용하는 기름을 치면은 좀 부드러워져 씹히는 정도가 약해진다. 재깐 앞 가마때기 위에서 오늘도 동생 둘과 나는 얼마나 울음을 참으며 고드름이 될 눈물을 흘려야 할지, 머리에 쇠똥은 왜 그리 많고 두꺼웠던지, 머리가 씹히어 따갑던 그 기분이 60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느껴지는 것 같다.
대학교졸업 초봉을 19만원 받던 그시절 마눌님이 묻는다, “큰동생 결혼 후 360만원으로 지하실 방을 구해주고, 막냇동생 결혼 후는 500만원으로 소형임대 아파트를 얻어 주면서 장남인 당신에게는 월세를 살게 하며 왜 아무것도 주지 않느냐?”고 물어 내가 아버지께 여쭈어보니까 동생들은 결혼했으니 살림을 내주어야 하고 너는 장남이니 어떻게 살림을 내주느냐 하시더라 답을 하고 이해시켜 왔다.
당시의 상속은 딸들은 제외하고 아들 셋과 부모 몫으로 각 25%씩하고 장남은 자기 몫과 부모 몫을 가지는 것이 올바른 상속이라 아버지께서 많이 말씀하셨는데, 한 세월 흘러 딸자식과 아들자식 구분 없이 균등하게 배부해야 한다고 세태가 바뀌어, 아버지께서 살림 내준다는 시절의 얘기와는 달리 장남인 내가 다 갖는 것 같은 인식을 주어 형제간의 사소한 트라블이 있어 마음 편하지 않은 부분이 있었는데, 앞선 생각을 실천하시던 아버지도 이런 세상이 올 줄은 생각도 못 하셨을 거라 여겨본다.
아버지는 손재주가 있어 한 날은 정미소에 방아를 찧으려 갔다 오시면서 삽을 여섯 자루 들고 오시어 큰집, 작은집, 아재 집에 나눠드리라 하시어 웬 삽이냐고 물으니 풀베기 대회에 나가서 2등을 해 상품으로 받아오셨다 하신다. 아무 대비 없이 가시어 즉흥적으로 임해 그 많은 사람 중에 2등을 하셨고, 매년 5월이면 한 내 걸 모래사장에서 펼치는 소싸움대회가 있으면 바지게, 덕석 등을 만드는 민속숙련공으로 뽑히어 소싸움을 공짜로 관람하고 민속공예 출연료를 받아 삼림에 보탰을 뿐만 아니라 손수만던 지게, 바지가, 도리깨, 대비 자루 등을 나누어 주기까지 하셨고 농한기 겨울이면 사랑방에서 엄마는 북을 넣고 아버지는 가마 틀을 움직여 밤새 가마닐 꿍덕 꿍덕 짜시어 리어카에 실어 20리 청도시장에 내다 팔아 돈을 만드셨다. 또한, 국민학교도 다니시지 않은 분이 먼 산 가시어 도장 나무를 구해와 숟가락과 젓가락을 철로 위에 올려 납작하게 해 숫돌에 갈아 손수 많던 조각칼로 동네 분들이 필요로 하시는 도장을 팠으니 솜씨에 있어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 같고,
위로 누님 두 분과 아래로 여동생, 남동생 둘로 그 시절에 다들 그랬듯이 삼남 삼여 중 셋째로 장남이라 많은 대접과 관심을 받아왔으나 아버지의 부지런하시고 불같은 성품에 고생도 많았다. 많은 고생 중 새벽에 일찍 일어나 소여물 써는 것과 동내를 돌며 약값을 받아오는 일이었다. 먹을 게 부족했던 그 시절엔 새벽같이 논밭에 일을 나가시어 이른 아침이 아니면 만나기가 어려웠다. 그 시절에 무슨 약값이냐 하면 아버지께서는 어지간한 병에는 만병통치약인 페니실린 주사를 놓으시고 감기에는 스트레트마이신을 처방하셨고 배알이, 몸살 정도의 약을 대구에서 도매로 사와 동내 필요한 분이 있으면 팔았는데, 내가 중학교 2학년, 그러니 1968년에 학교에서 무면허 의료행위는 범법이란 소리와 페니실린은 만병통치약이나 혈관에 잘 못 주사하면 즉사한다는 얘기를 듣고 아버지께 중단을 권해 그만두시었다. 약국에 가려면 왕복 40리 길을 걸어가다 와야만 하는 그 시절 잔병치레가 많을 때 아프면 선택의 여지 없이 아버지를 찾게 되고 심지어 난산에 아기까지 받아야 하는 환경이었고 농사일에 없어서는 안 되는 소가 아플 때 침을 주고 기도가 막혔을 경우 손으로 주무려 다스리는 것도 하면서 혼자 소 한 마리를 쓰러뜨리는 기술을 자랑하시곤 했는데, 침을 구하기 어려운 시절이라 손수 만들어 사용하셨다.
초등학교 시절 추석 지나면 운동회가 있는데, 상으론 2학년 때 달리며 암산 문제를 풀어 달려 2등 해본 게 다인데, 운동회비는 6년 내내 일등 낸 것 같다.
농한기 겨울밤이면 사랑방에서 엄마랑 가마니를 짜 20리 청도시장에 손수레로 앞에서 당기고 엄만 뒤에서 밀며 20리 청도시장에 내다 팔며 남들 다하는 국화풀빵 점심 요기 참아가며 돈을 아끼시는 것을 본 상곡띠기 아줌마는 나만 보면 저렇게 굵어가면서 공부시켜 놓으면 마누라 궁둥이만 쓰다듬을 줄 알지 부모 공덕 모를 끼라는 소리를 지나가는 말로 하도 많이 해 어린마음에 듣기 싫었으나 동기가 되어 남들보단 열심히 공부했던 것 같다.
동네 또래 6명 중 4명이 초등학교 나오고 한 명이 중학교 나왔는데 마을 생기고 처음으로 대학에 보내면서 준비성이 철저하여 내년 등록금을 마련해 종이가 부족한 그 시절 비료 종이에 꼭꼭 싸 매일 주무시는 사랑방 머리맡 사진틀 뒤에 올려놓아야만 잠을 잘 주무실 수 있다는 분이었다.
전기가 없던 시절 호롱불 아래 자식들을 둘러 앉어놓고 서산대사의 일본 사절시 일화들을 자주 들러주시며 애국과 친구간의 의리, 형제간의 우애의 주요함을 자주 일러주시었다.
동내 같은 또래가 같이 잘못 한 일들이 있을 때, 다른 예들은 다들 야단을 맞는데, 아버지는 야단을 치지 않으셨다. 그런데 잘못한 일을 여러 번 모았다 매를 드시며 곡소리 나게 벌을 주시고 왜 벌을 주어야만 했는지 설명하며 상처에 약을 발라주시던 분이었다. 그리고 고등학교에 들어가고 나니 너도 이제 성인이라 생각해 꾸중하지 않으시겠다 하신 후 한 번도 나무라신 적이 없으시다. 심지어 가족에게나 동네 분들께 그렇게도 엄하시었는데, 내가 고등하고 2학년 때 도회지 동기생에게 쫄리기 싫어 시작한 담배를 피운다는 말을 듣고 한마디 나무라지 않으시고, 자영이 사 오는 필터 있는 담배는 싱겁다면서 엄마를 시켜 책가방 속에 넣어주셨다.
나도 남들처럼 대학교 졸업 할 시점 애인이 생겨 졸업식 때 오게 해 가족들을 소개했는데, 아가씨가 어머니 친정 이 윗동네에 살아 수소문으로 알아보시고 나무를 한 짐 해와 마루에 있는 나를 보고 그 아가씨가 중학교만 나왔으면 좋았을 터라며 체념하듯이 내뱉는 아버지 말씀이 가슴에 새기어져 여러 번 생각해본 결과 손목 잡는 것까지 아껴두고, 졸업사진을 앨범 만들어 오라며 다 준 사진 한 장도 돌려받지 못하고 그녀와 멀어졌다. 만약 아버지가 나를 나무라며 반대를 했다면 반항해 그녀와 결혼을 했겠지. 그렇게까지 고등학교에 들어갈 때 약속하신 꾸중하지 않겠다는 말씀을 실천하신 분이라 누님. 누이처럼 초등학교밖에 안 나온 그녀에게 상처를 준 게 마음 편하지 않은 추억이다.
지금보단 키가 작았던 당시에 172cm였고 아침 전에 시시한 한 분의 하루 일 량을 하신 아버지는 먹을게 흔치 않던 그 시절 많은 약제나무와 독사,벌, 고양이 등을 잡아 자주 요리해 잡수시어서 인지 건강해 85세전에는 백내장수술
을 위해 두 차례 하루씩 2일간 병원에 입원한 그것 외는 병원에 가신 적이 없을 만큼 건강하시였는데 86세 때 3m 감나무에서 떨어져 1개월 병원에 입원하신 적이 있은 후로 건강이 악화되었다. 89세 때 뇌졸증으로 몇 개월 고생하시다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늙어 막에 정신건강이 좋지 않았는데 91세에 돌아가섰니 평균 90세, 부모님이 약한 첩 잡수시지 않고 90세 사시었는데, 난 혈압약, 당뇨약, 비타민 등 지금 먹는 약이 11가지를 먹으니 1가지에 1년씩 계산해 101세까지는 살지 않겠나 생각해왔는데, 70이 넘고 나니 약 1가지에 1년씩 더가 아니고 1년씩 빼 80세까지 살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을 고쳐 본다.
난 2005년부터 약 6년 부모님과 시골에서 살았고 아버지 돌아가신 지 13년, 주말이면 시골에 갔는데, 아침 정낭에서 보일 볼 때면 70 넘어 관절염 가지신 아버님이 어떻게 볼일을 보셨을까? 생각하면 번번치 않은 양변기 하나 달아드리지 못한 내라는 인간이 싫어지며, 그때마다 코끝이 아프다.
그간 아버지와 관련된 생각을 하며 끌적어 본 다음 글을 함께 하며 맺으련다.
≪ 큰 후회 ≫
살아계실 때
작은 효도라도 한다며
그렇게 애써 봤는데
칠순 기념품 삼아 달고 사신 무릎 관절염
비아이디이티는 몰라도
무릎 구부리지 않고 볼일 볼 수 있게 해주는
자식 놈 있어 행복했다
그런대로 잘 살아왔다
위안하셨을 아부지신데.....
그것 하나 못 해 드린 소생도 늙어 갑니다.
아부지 만날 그날까지
아침이면
자식 놈 코끝을 어루만지시겠지요.
아부지 사랑합니다.
2020.09.14 주말 시골에 가, 정낭에서 볼일을 볼 때면
더욱 곱씹게 되는 큰 후회.
≪ 나름 추억 ≫
난생처음(頭髮生後初本)
크림 내장 붕어빵
한입 무니
뜨거운 크림 맛 차가운 바람
최상 궁합
이게 행복일까?
팥 내장 붕어빵
한입 무니
생각 기능 작동되어
어린 시절로 인도한다..
사랑방
엄마는 짚을 찔러 넣고
아부지는 틀을 내리며
가마니를 짠다
척 철커덕
척 철커덕 겨울밤을 짠다
옆방
척 철커덕
척 철커덕 소리로
오는 잠 쫓아가며 공부를 한다..
네 자식 공부 잘 한 다더란 소문들은
울 엄마 아부지
겨우내 밤을 짜 청도장 날이면
소망 싫은 리어카를
아부지는 당기고 엄마는 밀며
이십 리 장터에 겨울밤을 팔려간다..
장에 가신 아부지 엄마 굶는 것 본 적 없지만
상곡띠기 아줌아 나만 보면
"붕어빵 풀빵 하나 요기하지 않고 아껴
공부시키고 나면 마누라 엉덩이 두들기기는 잘하겠지만
부모 공덕 모를 끼다"라며 혀끝을 차신다
다음에 또 붕어빵 사 먹을 땐
엄마 아부지 한 서린
팥으로 내장 채운 놈만 사 먹을 끼다
당시에 없던 크림 내장 채운 놈
공짜로 줘도 안 먹을 끼다
눈시울 붉어져 쳐다도 안 볼 끼다.
2018.12.18 손깍지 끼고 의자 뒤로 제낀 순간.....
≪ 그리움 ≫
농약 하기 힘들어 버리자는 아들 말에
내키지 않는 내색으로 그러자 답해놓고
몰래 등분무기 지고 소독하신 모양
'너의 아버지.
나무 아랫도리만 적시고 농약으로 목욕하시더라'란
소태 띠기 아지매 말씀에
오년 소출 이상 값을 치러 자동 등분무기 마련했으나
시간 없다 힘든다 미루기만 했네.
돌아가시고 난 지금
자동분무기 아까워 평생 품어야 할
아버지 등짝 같은 동네 어귀 쪽 밭.
아버지는
왜 큰 밭 젖혀두고
손바닥만 한 이 쪽밭에 더 미련을 두셨을까?
아마
육 남매 애중지 기른 징표로 여겼셨나 봐.
그늘에 앉으니
땀 마르고, 숨은 고르지나
괜스레 코끝이 찡~ 해지네.
2020.06.08 아버지를 생각하며....
≪ 작은추석 한마당 ≫
마당 한편에
늦더위에 지친 말의 거시거 처렴
축 늘어진 수세미가
세월 풍파에 속살 반쪽 내준 고목 감나무에 매달린 체
대롱거리는 작은 추석
감나무잎에 가려 시들지 않은 노오란 수세미 꽃
그리도 고왔는데.....
어깨 두런 책보자기 툇마루에 던지고
몇 년 입다 작아지면 동생에게 물려줄
장남에게만 장만해 준
추석치레 겨울내복을 입고
온 동네 한 바퀴 돌고 대문에 들어서니
두 누나 덕석 위에 펑펴지게 앉아
팔자로 두 번 꼰 짚수세미에
기와가루 뭍처 놋그릇 닦고
아버진 돌호박에 기와가루 곱게 빡고
엄마는
처마밑 아궁이에 솥뚜껑 엎어놓고
숟가락으로 긁어낸 누런 호박 속살
밀가루반죽에 묻어 호박떡을 굽는데
동생 셋은 모이 물고 온 엄마 기다리는 새끼제비 마냥
젓가락 들고 쪼그려 앉아 엄마손만 쳐다보네
들어오는 나 본 엄마
장남 왔다고 좋아하시며
쟁반 위에 올려준 호박떡
어찌나 달고 뜨겁던지
눈 질끈 감았다 떠보니 온 식구 한마당
행복으로 덮어있네
매년 이맘때면 찾아보는 놋그룻 행방
엄마 아버지 저 세상 가
물어볼 수 없고
녹슬지 않는 스텐, 양은그릇으로 다 바꿨을 꺼라
한 개도 남김 없는 아쉬움에
가마득한 추억으로 상상해 본다.
2023.09.05 불로동 오일장날 펑튀기 고소한 맛 상상하며.
≪ 아까번 생각 ≫
이나이까지 살면서
골백번 생각했다
경자를
아니 경자가 아니고
경자를 한번 쯤
덥쳤으면 어쨌을까를
시집 오면 안을 꺼라고
아껴온 석삼년인데
예쁜 앨번 만들어 오라고
대학졸업 사진 필림째 줬는데
부모님 정이 깽판친 인연
아까버니 생각 난다
시도 때도 없이
특히 지금 같이 일손 놓고 있으니.
아이고 아까버!
2018. 12. 28 심심해 한 골때리는 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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